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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열하일기

이것이 살위봉법이란 것이랍니다

6월 25일과 26일은 짧게 서술하고 지나가더니 27일은 조금 길게 기록되어 있다. 그 중 흥미를 끄는 대목이 여럿 시선을 잡는다.

 

“의주 상인 중에서도 한가, 임가 같은 자들은 해마다 북경 드나들기를 제 집 문 드나들듯 하여 북경 시장의 장사치들과는 아주 창자가 맞통하다시피 되었다.”

‘-자들은’아런 표현으로 알겠지만 당시 세태를 비판하는 대목이 뒤에 이어진다. 하지만 정작 눈길을 잡은 것은 ‘창자가 맞통하다’는 표현이다.

 

조금 더 뒤로 가 하인인 장복이와 나누는 대화에서는 공허함마저 느끼게 한다.

“내가 일찍이 들으니 구요동이나 동악묘 같은 데는 악당들이 많다는데, 네가 또다시 한눈을 팔다가는 앞으로 얼마나 많은 물건을 잃을지 모르겠구나.”

“소인은 이미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 데 가서 구경을 할 때는 소인은 두 손으로 눈을 막을 터온바, 그렇게만 한다면 눈을 팔기는 고사하고 어떤 놈이 내 눈을 뽑아 가겠습니까?”

 

농을 농담인지 모르고 참말로만 알아듣는 장복이에 대해 연암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이렇게도 한심한 놈이 또 있을 것인가? .... 먼 기에 길동무가 이 꼴이니 참으로 기가 막히고 답답하구나.”

 

장복이의 진면목을 알 수 있는 대목이 있다.

“장복아, 너는 죽어서 중국에 한번 태어나면 어떨꼬?”

“천만에요. 소인은 싫습니다. 중국은 되땅이니까요.”

“마침 한 장님이 어깨에 비단 주머니를 둘러메고 손으로 월금을 타면서 지나간다. 나는 깨달았다. 응! 이것이야말로 정말 평등한 눈이로구나.”

 

연암은 간혹 아니 자주 더 설명을 할 듯하다가 멈추곤 한다. 때론 상세하게 설명하는 방식을 선호하는 듯 보이지만, 정작 중요한 의미가 담긴 사건은 짧게 끝내곤 한다.

“이것이 살위봉법이란 것이랍니다.”가 그 대표적이다.

소동 아니 사건이 일어났고, 이를 그저 ‘살위봉법’으로 마무리짓고 있다. ‘살위봉법’의 의미도 밝히지 않고, 또한 ‘상위봉법’ 하나 만으로 얼마나 많은 얘기꺼리가 있지 않겠나. 하지만 연암은 다들 얘기하고 싶어하는 소재에 대해서는 길게 서술하지 않는다.

 

‘살위봉법’에 대해 각주에서는 ‘중국의 무술, 18기에 쓰는 한 가지 법’이라고만 쓰여 있다. 이로는 의미를 알 수 없어 인터넷 서치를 해보니, 혹자 또한 이 문구에 흥미를 가지고 각주를 남긴 이가 있었다. 그가 남긴 각주는 다음과 같다. <<수호지>>에 나오는 말로, 옥졸이 새로 온 죄수에게 ‘살위봉’이라는 몽둥이로 마구 때려 기를 죽이는 것. 여기서는 먼저 선수를 쳐서 상대의 기를 죽인다는 말이다.

 

더불어 칼럼에서 발견한 ‘살위봉법’의 의미 즉, 본보기로 한두 명을 잡아서 엄청난 폭력을 가한 뒤 나머지 사람들을 겁먹게 하여 그들 전체의 복종을 유도하는 방식. 칼럼을 읽어보니 ‘살위봉법’이 낯설지 않은 시대라고 느끼는 것은 나만이 아닌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