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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열하일기

자네 도를 아는가?

“창대는 앞에 서고 장복이는 뒤에 붙었다.”

연암이 말을 타고 청으로 향하는 모습이다. 창대는 마부이고 장복이는 하인이다. 그러니까 연암은 양반으로서 마부와 하인을 거느리고 있다. 이는 당시에 엄연히 양반과 노비 제도가 유지되던 시대이니, 별반 새로운 것이라 할 수 없다.

 

하지만 여기서 흥미를 끈 것은 마부와 하인의 이름이다.

창대(昌大), 장복(張福). 한자를 보면 마치 세상 전부를 가질 듯한 호기가 느껴지지 않는가. 개똥이, 쇠똥이가 아니라 좋은 의미의 한자를 차용한 이름이 사뭇 서민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또 하나의 이름을 추가하면 홍명복(洪命福)으로 수석 역관이다. 이 또한 한자를 보니 너무 좋아서 하늘이 시기 할 만 하지 않은가? 연암이 홍명복과 나눈 대화를 이어 기록하면 다음과 같다.

 

 

 

“자네 도를 아는가?”

“도를 안다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세. 도는 저 강시울에 있느니.”

“세상 인심은 갈수록 간드러지고 도심은 갈수록 메말라든다고 했네. 서양 사람들은 기하학에서 한 획의 선을 변증 할 때도 선이라고만 해서는 그 정미한 점을 표현할 수 없다 하여 빛이 있고 없는 짬으로 표현하였고, 불교에서 말하는 붙지도 떨어지지도 않으므로 그 짬에 처할 수 있다는 바로 그 짬으로써, 이는 도를 아는 자라야 할 수 있는 노릇이니, 이런 사람은 장나라 자산 같은 이를 들 수 있을 것이네.”

 

그저 모르겠다는 듯 질문을 하는 홍명복의 말을 제외하고 연암의 말만을 적어 보았다. 도를 아는가?라는 문장에서 웃음이 절로 나오는 것은 요새 길 거리에서 도를 아느냐고 묻는 이들이 연상되기 때문이다. 연암에게 도는 짬이라는 데,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서양의 기하학을 언급하거나 유교와 불교를 동시에 표현하고 중국 춘추시대 정치가인 자산으로 대화를 종결하는 형식이 눈에 익다.

 

아마 뒤에서도 계속 나올 테지만, 바로 이런 식의 글 표현이 연암의 표현 방식이다. 생각이란 놈이 구름 위를 뛰어다니듯 자유롭게 펼쳐지면서도 하늘이라는 범주를 넘어서지 않은 채 글을 마무리한다. 유교에서 시작하여 서양학으로 건너갔다가 불교에서 멈추는 듯하더니 이내 중국 정치가를 언급하고 더 얘기가 진행되리라 추측할 사이에 대화를 종결한다. 이는 연암의 단편을 모은 ‘나는 껄껄 선생이라오’에서 흔하게 발견되는 연암의 독특한 표현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