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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열하일기

이용후생

연암은 실용을 중시하는 면이 강하다. 이는 당시 이론만을 중시하던 풍토와 사뭇 다르지만, 연암의 실용주의가 훗날 북학파에 영향을 주었다는 점만은 확실하다. 청을 오랑캐 나라라고 배척하는 분위기에서 청을 배우자는 북학파와 연암은 어느 정도 의견 일치를 본 것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이를 단적으로 알 수 있는 대목이 있다.

“옳다! 이렇게 난 후에야 이용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요. 이용이 있은 후에야 비로소 후생이 될 것이요. 후생이 있은 후에야 그 질서를 바로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물건을 이롭게 쓸 줄 모르고 그 생활을 넉넉하게 할 수는 없는 법이다. 물건을 이롭게 쓸 줄 몰라 생활 자료가 근본 부족하면서 억지로 잘살겠다고만 한다면 어떻게 그 도덕과 질서를 바로잡을 것인가?”

 

바로 이용후생에 대한 연암의 정신은 열하일기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중국의 물건들을 유심히 살펴보고 조선의 물건들과 비교하여 장단점을 나열하는 장면이 나온다. 특히 중국의 벽돌에 대해서는 지대한 관심을 표명하는데, 페이지를 몇 장 넘기면 그에 대한 기록이 있다.

 

 

 

“벽돌에는 세 가지 경계하는 것이 있다. 첫째로 귀가 떨어진 것, 둘째로 모가 죽은 것, 셋째로 뒤틀어진 것이니, 이 세 가지 중에 한 가지라도 범한다면 모처럼 온채 집에 들인 공을 잡칠 수가 있다.”

 

“기와를 이는 법은 더구나 본받을 만한 데가 많으니, 모양은 동그란 통대를 네 쪽으로 쪼개면 그 한쪽 모양처럼 되어 크기는 두 손바닥쯤 된다. 보통 민가는 짝기와를 쓰지 않으며 서까래 위에는 산자기와를 인다. 한 장은 엎치고 한 장은 젖히고 암수로 서로 맞아 틈서리는 한 층 한 층 비늘진 데까지 온통 회로 발라 붙여 때운다. 이러니까 쥐나 새가 뚫거나 위가 무섭고 아래가 허한 폐단이 절로 없게 된다. 우리나라의 기와 이는 법은 이와는 아주 다르다. 지붕에는 진흙을 잔뜩 올리고 보니 위가 무겁고, 바람벽은 벽돌로 쌓아 회로 때우지 않고 보니 네 기둥은 의지할 데가 없어 아래가 허하며, 기왓장이 너무 크고 보니 지붕의 비스듬한 각도에 맞지 않아 절로 빈틈이 많이 생겨 부득불 진흙으로 메우게 되며, 진흙이 내리눌러 무겁고 보니 들보가 휠 염려가 없지 않다. 진흙이 마르면 기와 밑창은 절로 들떠 비늘처럼 이어 댄 데가 벗어지면서 틈이 생겨 바람이 스며들고 비가 새고 새가 뚫고 쥐가 구멍을 내고 뱀이 붙고 고양이가 뒤집는 등 온갖 폐단이 생긴다.”

 

이처럼 연암은 중국에 도착한 후 줄곧 벽돌에 관심을 보이며 제조방법과 활용법에 대해 끊임없이 강구한다. 덧붙이자면 연암의 이용후생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벽돌 이외에 똥이 있다. 변에 대한 얘기는 후에 등장하리라...